2006년 06월 30일
*친왕록(親王錄)-1장-원아(園兒)-1화
- 이 글은 픽션이므로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다릅니다.
주명위(朱明衛)는 황제(皇帝)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는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개구쟁이의 얼굴과 거리낌 없이 하고 싶은 것을 해 버리고 마는 제멋대로의 성격을 지녔으나, 아직은 어린 탓에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 그는 한창 자라나는 중이었지만 겨우 열 살에 불과했고, 세상을 알기에는 모든 것이 궁금할 뿐이었다.
십여 년 전, 정명황후(正明皇后) 이(李) 씨가 그를 낳고 일 년 뒤에 병들어 죽었으므로 소비(素妃) 진(陳) 씨가 그를 맡아서 길렀다. 소비 진 씨는 정이 많았으나 시시비비가 분명하였고 그 표현을 노골적으로 하였으므로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반면,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알면서도 성격을 고치려 들지 않았다.
그녀는 열두 살에 한낱 시녀(侍女)의 신분으로 자금성(紫禁城)에 들어와 열아홉 살에 빈(嬪)이, 서른한 살에 비(妃)가 되었다. 하지만 자녀는 없었고 마침, 주명위를 맡을 수 있게 되어 친아들처럼 여기고 키웠다. 주명위도 철이 들 때까지 그녀가 친어머니인 줄로만 알았으며 이후, 친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어도 의연히 ‘어머니’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했다.
주명위는 놀기를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그 때문에 소비 진 씨와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북경성(北京成) 내성(內城)의 중앙에 불과한 자금성(紫禁城)도 그에게는 너무나 거대한 세상이었으므로 구경거리는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 구경하던 곳을 마저 구경하기 위해 아침마저 대충 때우고 달려 나가곤 해서 소비 진 씨가 한두 번 꾸짖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꾸짖을 때만 잠시 반성하는 척하다가 곧 잊어버리길 반복했다.
어느 날, 그는 정전(正殿)인 태화전(太和殿)에 갔다가 시녀와 함께 있는 귀여운 계집아이를 발견했다. 나이는 열두 살 정도인 것 같았고, 발을 가리는 긴 비단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녀가 아니라 어느 대신(大臣)의 딸이거나 손녀인 것 같았다. 자금성은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므로 그 대신은 아마 고위층일 것이다.
그녀는 머리를 길게 땋았고 볼 살이 통통한 얼굴에 큰 눈이 인상적이었다. 머리를 약간 숙이고 있어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하얀 피부 때문에 더욱 귀엽게 보였다. 그녀는 이곳에 처음 왔는지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렸다. 손으로는 연신 옷자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는데 아마 나이가 훨씬 많은 시녀들이 같이 놀아주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이 불만인 것 같았다.
주명위는 갑자기 그녀와 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지금 그와 함께 있는 소비 진 씨는 감기가 들어 며칠째 콜록거리며 몇 발자국 걷지 않아서 쉬고, 또 몇 발자국 걷지 않아서 쉬었기 때문에 도무지 그를 따라다니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힐끗 그 계집아이를 쳐다보고 나서 헛기침을 하며 소비 진 씨에게 말했다.
“어머니, 바람이 찬데 이만 들어가 보세요.”
그러자 그녀가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는 불과 몇 시간 전에 감기에 걸린 그녀를 끝끝내 끌고 나오고 싶어서 온갖 감언이설(甘言利說)과 협박을 다 동원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놀러 갔다가 오면 어깨를 주물러 주겠다고 했고, 같이 나가지 않으면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온 것인데 갑자기 들어가 보라니, 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황자(皇子) 전하(展下)께서는 또 마음이 변하신 게로군요. 변덕이 죽 끓듯이 하니, 이 어미는 어떤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손해 보는 사람이 이 어미밖에 없으니 그렇다 치고, 나중에는 한왕(漢王)이 될지도 모르는데 전하가 이렇듯이 자꾸 변덕을 부리시면 나라가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그녀가 꾸짖을 때는 위아(衛兒)라는 애칭을 부르거나 아드님이라고 하지 않고 ‘황자 전하’라고 꼭 격식을 차렸다. 또한, 자신을 어미라고 낮추어 불러서 그가 책임감이 생기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서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계집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그럴 나이가 되었나 싶어서 흐뭇하기도 하고, 품에서 벗어나려는 것 같아서 얄밉기도 했다.
그녀가 한왕을 들먹거린 것은 황제의 아우인 한왕 주현래(朱賢來)가 아들이 없어서 후사(後事)를 잇지 못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은 나이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좀 더 기다려 봐야 하겠지만, 훗날에도 아들을 얻지 못한다면 주명위를 양자(養子)로 삼아서 한의 왕세자(王世子)로 세울 가능성이 높았다. 황제의 첫째 아들인 황태자(皇太子) 주지선(朱智宣)은 몸이 허약하여 반평생을 자리에 누워 있었고, 둘째 아들인 월왕(越王) 주소진(朱紹振)은 그런 이유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자금성에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주명위는 다시 힐끗 계집아이를 쳐다보고 소비 진 씨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감기에 걸렸으니 밖에 오랫동안 있는 것은 좋지 않아요.”
“이 어미를 억지로 데리고 나온 분이 누구시더라?”
“네, 네. 제가 데리고 나왔지요. 너무 방안에만 있으면 답답하잖아요.”
“말은 잘하시는군요.”
“어머니를 위하는 마음은 이 위아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주명위는 꼬박꼬박 잘도 대꾸했다. 소비 진 씨는 그가 같이 돌아갔으면 했으나 고집을 꺾을 낌새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채고 계집아이 근처에 있는 시녀를 손짓하여 불렀다. 시녀 하나가 다가와 그녀를 보고 머리를 조아렸다.
“소비 마마가 아니십니까? 소녀가 안부를 여쭙습니다.”
“잘 지내고 있네. 그런데 저 계집아이는 누구인가?”
“이부상서(吏部尙書) 송응성(宋應星) 공(公)의 딸인데, 몰래 따라왔다 하여 저희더러 잠시 데리고 있으라고 부탁하였사옵니다.”
“그렇구나. 어쨌든 나는 내정(內廷)으로 돌아가 봐야 하고, 황자 전하께서는 저 아이를 말벗으로 삼고 싶어 하니, 뒤에서 잘 돌봐 주시게.”
그러자 시녀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소비 진 씨가 웬 사내아이를 하나 데리고 있기에 심부름하는 어린 환관(宦官)인 줄로만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주명위는 옷을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길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옷을 제대로 차려입고 다니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자신을 계속 주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게 돌아다니는 데에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그는 여느 어린 환관이 입는 옷이나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차려입었다. 시녀는 냉큼 그에게도 머리를 조아렸다.
“알고 보니 황자 전하셨군요. 저의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그러자 주명위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 하고 주의를 주었다. 자신이 황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소비 진 씨는 잠시 콜록거리다가 간신히 말했다.
“이 어미는 이제 내정으로 돌아갈 터이니 잘 놀다 오세요.”
“네, 그럼 저녁에 찾아뵙겠습니다.”
“식사마저 거르시고 쏘다니시면 아니 되니 저녁이 되면 제가 찾으러 다닐 것입니다.”
“어이쿠! 어머니는 감기에 걸리셨는데 여기저기 찾으러 다니다니요? 제가 꼭 시간을 맞추어서 가겠습니다.”
“그 말을 믿지요.”
주명위가 과장해서 말하자, 소비 진 씨는 일부러 엄한 표정을 내보이고 돌아섰다. 그는 이렇듯이 굳은 약속을 해도 곧 잊어버리기가 일쑤여서 장난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소비 진 씨가 돌아서자 시녀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그러자 주명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집아이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안녕? 네 이름은 뭐야?”
“원아(園兒)라고 해.”
원아가 당돌하게 말을 되받아쳤다.
“그런데 넌 환관이니?”
# by | 2006/06/30 22:04 | 친왕록(親王錄)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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