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 10일
*친왕록(親王錄)-6장-총지(聰持)와 설지(雪漬)-160화
*친왕록(親王錄)-6장-총지(聰持)와 설지(雪漬)-160화
왜 하필 그녀가 떠올랐을까? 모두가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할수록 왜 그녀의 얼굴만은 또렷하게 보이는 것일까?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되었으니, 그녀에 대해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가 노골적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너무나 솔직했기 때문에 속이는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겼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울고, 짜증날 때 화내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눈치를 살피지 않고 해치우고, 자신마저 속이지 않으며 적나라하게 살았다. 체면을 차리지 않는다는 말로는 부족하여 뻔뻔하기 짝이 없다는 말을 해줘야 하는 것이다.
“완전히 술에 떡이 되셨군.”
아니나 다를까, 한참 어둠속을 헤매고 있는데, 비아냥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조석을 꾸짖은 그녀의 야무진 입이 이제는 그에게 손을 뻗친 것이다. 주명위는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으나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안간힘을 써서 겨우 입을 열었다.
“술에 떡이 되다니!”
어눌한 목소리가 갈라져 알아듣기 힘들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어머! 깨셨군요?”
그는 그렇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목이 꽉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속은 쓰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눈앞에는 끝없이 일렁거리는 어둠이 펼쳐져 있었고, 지금 누웠는지 앉았는지 섰는지 알 수 없어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말하는 것조차 귀찮아 이대로 조용히 잠이 들었으면 싶었다. 그리하여 그가 노곤하게 빠져들 무렵, 그녀의 목소리가 그를 다시 잡아끌었다.
“깨신 게 아니라 주정이셨나?”
그의 코에 향긋한 냄새가 얼핏 스치는가 싶더니 무엇인가 내려놓는 듯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바닥에 발을 끄는 소리, 창문이 닫히는 소리가 차례대로 들리고 마지막으로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드디어 기다리던 침묵이 찾아왔다. 그러나 때를 놓쳤는지 점점 머리가 맑아져서 잠이 오질 않았다.
그는 할 수 없이 눈을 떴다. 창이 어슴푸레한 것을 보니 아직 새벽이었다. 어제 신세를 졌던 그 방에 그대로 누워있는 것으로 보아 이민흥과 유진진이 취영루에 들렀다가 유진진의 집으로 또 업어온 모양이었다. 그는 주전자를 찾아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자 깜짝 놀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어디까지 꿈이었는지 생각하기 싫어서 수련용 검을 찾아 뜰로 나갔다. 그리고 나무 아래에서 한참이나 멍하니 서있었다. 바람이 불어 머리위에 낙엽이 우수수 쌓였다. 그는 하릴없이 손에 들린 검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낙엽이 땅에 닿기 전에 검을 내질렀다. 낙엽이 검 끝에 부딪치더니 파삭, 하는 소리를 내면서 부서졌다. 잠시 후, 그는 낙엽을 보고 검을 또 내질렀다. 나중에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까지 악물고 정신없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워낙에 많은데다가 곧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모든 낙엽을 부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그는 점점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헛손질이 많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고 정확하며 자연스럽게 낙엽을 부수었다. 낙엽이라도 부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그만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눈으로 쫓을 수 없는 속도로 검을 휘둘러 낙엽을 놓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땀을 흠뻑 뒤집어쓴 상태로 아침을 맞이했다.
평소였다면 만족스러웠을 테지만, 뜬금없이 화가 치밀었다. 그는 나무를 걷어찬 뒤, 눈처럼 흩날리는 낙엽을 향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마음속 깊은 곳에 들어앉아 그를 짓누르는 게 무엇인지 알아보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알 수 없는 기분을 마구 쏟아냈다. 부서진 낙엽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그는 소리조차 크게 지르지 못한 채 결국 지쳐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바닥에 반듯이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낙엽 하나가 얼굴에 내려앉았고 내키지 않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이대로 취영루에 가서 설지를 단번에 벨까?”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얼굴에 내려앉은 낙엽이 팔랑거리며 날아올랐다가 땅에 떨어졌다. 그곳에는 총지가 서있었는데, 그녀는 그가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듯 한참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엉망진창인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느닷없이 웃음이 나왔다. 낄낄 웃다가 뚝 그쳤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낄낄 웃다가 뚝 그쳤다. 스스로 미치지 않았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녀는 그가 주정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야기나 하려고 거리낌 없이 다가왔다. 실제로 술이 완전히 깨지 않았는지 그는 문득 놀리고 싶은 기분이 들어 그녀에게 짓궂게 물었다.
“왜 자꾸 얼쩡거리는 거요? 성은(聖恩)이라도 받고 싶소?”
그녀의 대답은 거침없었다.
“저는 그런 음탕한 여자가 아닌데요.”
“그럼 대체 뭐요?”
“그저 전하와 친해지려는 거예요.”
그녀는 드러누운 그를 내려다보며 뻔뻔하게 웃었다.
“몸을 붙잡아봤자 소용이 없으니 마음을 붙잡으려는 것이지요.”
“왜 내 마음을 붙잡으려는 거요?”
“나중에 한왕비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는 콧방귀를 뀌었다.
“내 마음을 붙잡기만 하면 한왕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네.”
“자신만만하군!”
“모든 것이 결국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기 마련이니까요.”
그는 초점이 없는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마음속 깊은 곳에 들어앉아 그를 짓누르던 것이 멀리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녀와 같은 성격이라면 모두가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나불거리고 행동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지만, 적어도 지켜보는 사람을 헷갈리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평범한 여인이었다면 그쯤에서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여인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같이 웃으며 자신의 기분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리고 적절한 때를 기다려 웃음을 거두고는 어색해지려는 분위기를 돌렸다.
“자, 아침을 드셔야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어제처럼 아침을 먹고 나서 차 한 잔 줄 수 있겠소?”
“물론이죠.”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대꾸했다.
“물론 귀신이 차를 다 마셔버리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귀신?”
“네. 어제 전하께서 집을 나서신 뒤, 곧바로 방으로 돌아가 보았는데 한 잔 따라놨던 차가 감쪽같이 사라졌더군요. 밖에 오래 있지도 않았으니 누군가가 잽싸게 들어가서 차를 마셨을 가능성은 없어요. 그런데 귀신도 참 희한한 귀신인 것 같지 않아요? 다른 건 다 놔두고 하필 차만 마셨으니 말이에요.”
그는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었다.
“날 따라다니는 귀신을 말하는 것이었구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하를 따라다니는 귀신? 정말인가요?”
“그렇소.”
“거짓말하지 마세요.”
“거짓말이 아니오. 못 믿겠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차 한 잔을 따라놔 보시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직접 겪은 일이라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구나 앞장선 그를 따라 바람이 휭 불자 진짜 귀신이 따라다니는 것만 같았다. 솔직한 사람은 이럴 때 불리했다. 애써 태연한 척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으니 민망한 꼴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오싹한 기분이 들어 재빨리 그에게 따라붙었다.
방에는 이민흥과 유진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어제처럼 아침을 가져와 당연하다는 듯이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귀신 이야기를 떠벌리며 방을 힐끔거렸다. 이민흥과 유진진은 그녀가 말하는 게 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주명위가 알려주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그녀에게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이민흥이 젓가락을 놓으며 물었다.
“오늘도 취영루에 가실 것입니까?”
주명위는 깜짝 놀란 듯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래.”
“가지 말라고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조공의 곁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알았어.”
“낙양에서 전하를 데려갈 사람이 오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는 이미 서찰을 왔다고 하고요. 아마 한왕 전하께서는 낙양에서 전하를 왕세자로 책봉하실 모양인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여우는 지금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겁니다. 낙양에도 여우를 따르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북경에서 전하를 죽이는 것만큼 수월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당분간 조심 또, 조심하십시오.”
그는 귀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이민흥과 유진진이 조석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자금성으로 떠났고, 총지는 약속대로 차를 가져왔다. 주명위는 차를 마시며 잠시 느긋하게 평온을 맛보았다. 그러나 잔이 바닥을 드러낼수록 그 기분이 사라지더니 차를 다 마신 뒤에는 취영루에서 설지를 어떻게 봐야 할지 걱정이 몰려왔다.
“무슨 일이 있나요?”
그가 집을 나서자 총지가 따라오며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소. 어떤 기녀를 죽여야 하오.”
그가 아무리 황제의 셋째 아들이라지만,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말은 흘려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표정의 변화가 없었고 놀라거나 말리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가 그렇게 해야 한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인데, 무슨 이유가 있어 얼굴이 그렇게 안 좋은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녀를 죽이는 게 괴롭나요?”
“그렇소.”
“왜 괴로운데요?”
“나름대로 정이 들었고 신세를 진 것도 있기 때문이오.”
“그럼 죽이지 않으면 되죠.”
“그건 안 되오.”
“그녀를 꼭 죽여야 하나요?”
“그렇소. 그녀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이오.”
그녀는 볼을 긁적거리다가 말했다.
“알 수 없는 이야기군요.”
“오늘부터는 그녀에게 술을 권해야 할 듯하오.”
“왜 술을 권하죠? 술을 권하면 그녀가 죽나요?”
“권하지 않아도 죽을 것이오.”
그는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겨우 말했다.
“그러나 술 때문에 죽을병에 걸렸으니 권하면 더 빨리 죽겠지.”
“아!”
그녀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어쨌든 그녀가 죽을병에 걸렸으니 저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네요.”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가 다행스러운 일이란 말이오?”
“전하께서 그녀와 나름대로 정이 들었고 신세를 진 것도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그대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요?”
“있죠. 한왕비의 자리는 하나뿐이잖아요.”
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덧붙였다.
“저는 그녀가 빨리 죽기를 바랄게요.”
그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고는 화들짝 놀라 화낼 기운마저 쑥 빠져버렸다. 그녀가 너무 심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역시 설지가 빨리 죽기를 바랐으니 무슨 말로 꾸짖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총지를 노려보다가 차갑게 물었다.
“그대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나불댔다.
“물론, 영원히 죽지 않을 수는 없겠죠. 하지만 하늘이 정해 준 수명이 다할 때까지는 악착같이 살아남을 거예요. 물에 빠지고, 불에 던져지고, 목에 칼이 들어오고, 돌림병에 걸리고, 누가 나더러 죽으라고 윽박질러도 끝까지 살아남을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다 죽어도 혼자 살아남을 자신이 있어요.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려야지 죽긴 왜 죽어요?”
그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입에서 또 무슨 말이 나올까 무섭기까지 했다. 그러나 꿋꿋하게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큼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죽은 원아와 소비 진 씨 그리고 죽어가는 설지를 생각하자면 그것만큼 돋보이는 것도 없었다. 게다가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신!”
그때,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려 조석을 째려보았다.
“전하를 똑바로 보필하세요!”
조석은 끙 하는 소리를 냈으나 입술을 질끈 물고 그녀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 먼저 대문 밖으로 나갔다. 주명위도 그를 따라 한발 내디뎠다가 무엇인가 그를 끌어당기는 듯해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그녀에게서 알 수 없는 기운이 손을 내밀어 뒤통수를 어루만지는 기분이었다.
주명위는 한참이나 그녀를 주시하다가 몸을 홱 돌려서 취영루를 향했다. 이번에는 설지가 화장을 하고 대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화장으로 가릴 수 없는 곳에서 그녀의 ‘속병’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드러난 목은 한손으로 움켜쥘 수 있을 것 같았고, 손목은 가늘어서 뚝 부러지지 않는 게 신기했다. 게다가 소매에 희미하게 남은 핏자국은 피하려고 해도 계속 눈에 밟혔다.
“내가 왔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자신 있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어서 오세요, 공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늘도 술을 마시러 오셨죠?”
그는 못 이기는 척하며 끌려갔다. 멀리서 물끄러미 보고 있던 소미가 머리를 가볍게 숙였다가 사라졌다. 그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정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언뜻 부러울 수 있으나 정작 기뻐해야 할 때와 슬퍼해야 할 때 억지로 표정을 만들어야만 하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그게 싫어서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공자, 참 이상한 일이 있어요.”
설지가 방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엄마’가 저에게 다른 손님은 받지 말라고 했다니까요.”
그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러냐?”
“아마 공자께서 자꾸 저를 찾으시니까 그런가 봐요.”
“그래.”
도저히 말을 길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고 생각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밖으로 눈을 돌렸더니 조석이 말없이 문을 닫았다. 오늘도 술을 마시지 않을 모양이었다. 곧 하인들이 들어와 술과 안주를 내려놓고 사라졌는데 주명위는 그것을 보고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웃으며 술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가 잔 하나를 그녀의 앞에 탁 놓았다.
“네 잔도 따라라.”
그녀가 깜짝 놀란 듯 잠시 멈칫거렸다. 손님이 기녀에게 술을 권하는 게 드문 일이 아니었으나 그의 말과 행동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속병’을 앓는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많은 신경을 썼다. 두렵지 않을 리가 없겠지만,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다면 평소처럼 지내다가 갑자기 사라지듯 죽고 싶었다. 소미를 비롯하여 취영루의 기녀들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손님인 그가 알 정도라면 취영루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소미가 그녀에게 다른 손님을 받지 말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술병을 쥔 설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다른 손으로 손목을 꽉 쥐었으나 더욱 떨려 술이 마구 튀었다. 그녀는 흑, 하는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갑자기 밝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역시, 다른 손님들처럼 혼자 마시는 술은 안 좋은가 보군요?”
“그런 것 같다.”
그는 그녀가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짓느라 얼마나 가슴이 아플지 가늠했다.
“오늘부터는 너도 내가 마시는 만큼 마셔라.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전 어리지 않아요.”
그가 한잔 들이키자 그녀도 한잔 들이키며 말했다.
“그래서 이까짓 술 따위는 물 마시는 것처럼 마실 수 있지요.”
그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렇구나.”
“전 정말 어리지 않아요.”
“그래.”
“전 어른이란 말이에요.”
“그래, 너는 어른이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곧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더니 급기야 콧물까지 흘리며 흐느끼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보고 있기가 괴로웠다. 그녀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그러자 그녀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그를 따랐다.
“살만큼 산 어른!”
취기가 돌자 그녀는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어른이 이 따위 술을 마시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되죠.”
“그래,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셔 보자.”
그와 그녀는 경쟁하듯이 술과 안주를 해치웠다. 마시다 보니 웃다가 울다가 앉았다가 엎드렸다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술에 취해 탁자에 머리를 박았다가 깨어나 마시길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벌써 밖이 어두웠다. 그는 거나하게 취해 몸을 똑바로 세울 수 없었다.
“설지야.”
그는 혀가 꼬이는 목소리로 엎어진 그녀를 불렀다.
“죽었냐?”
“아뇨.”
그녀는 꺽, 하는 소리를 내더니 부스스한 얼굴을 불쑥 들었다.
“아직 안 죽었어요.”
“설지야.”
그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직 살아 있다고?”
“네.”
그녀가 쿵, 탁자에 엎어졌다. 술병과 접시가 제멋대로 굴러다녔다.
“그럼, 빨리 죽어라.”
그가 기우뚱거리며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네가 죽기 전에 내가 먼저 죽겠다.”
“싫어요.”
“죽기 싫어?”
“아뇨. 공자께서 죽는 게 싫어요.”
“사람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지.”
“그건 예전에 제가 했던 말이에요.”
“그런가?”
“그래요. 그러니 절 베세요. 사람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잖아요.”
“그건 싫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자께서는 달라지신 게 없군요.”
그녀가 원망하듯이 덧붙였다.
“그날, 왜 저를 죽이지 않으셨나요? 그때 죽었다면 이렇게 무섭지 않을 텐데!”
그는 술이 확 깼다. 그의 머릿속에는 고문정의 집에서 은령과 함께 지내던 무렵, 설지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녀는 피가 뚝뚝 흐르는 검을 가진 그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검을 뽑아 그녀의 가냘픈 목에 바싹 가져다 댔지만, 그녀는 죽여 보라고 말하며 도리어 목을 내밀기도 했다.
“그렇군.”
그는 더듬거리며 잔을 꽉 쥐었다.
“그때 벌써 ‘속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구나.”
“그래요. 그래서 공자께서 절 벴으면 했어요.”
“하지만 내가 널 베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잖느냐?”
“물론이죠. 그때 공자께서는 대협(大俠)이셨으니까요.”
“그럼 지금은 아니란 말이냐? 왜 자꾸 널 베라는 것이냐?”
“지금 공자께서는 대협이 아니라 전하, 전하시잖아요.”
그녀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들었다.
“제가 모를 줄 아셨어요?”
눈물, 콧물이 뒤섞여 화장이 지워진 그녀의 얼굴에는 검은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아 눈뜨고 볼 수 없었다. 그녀는 꿈틀꿈틀 움직여 손으로 얼굴을 쓱 닦아내고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무엇인가 목구멍에 걸린 듯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더니 울컥 피를 토했다. 탁자에 검붉은 피가 철철 흘러넘쳤다.
“죄송해요! 제가 거짓말을 했어요!”
그녀는 훌쩍거리며 그에게 매달렸다.
“전 어려요!”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비명이 되었다.
“그러니까 더 살고 싶어요! 조금만 더 살고 싶어요!”
그는 몸이 덜덜 떨렸다. 그녀가 죽는 모습을 도저히 눈뜨고 지켜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생각으로 그녀와 함께 술을 마시는지 알 수 없었다. 달라붙는 그녀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어서 총지에게 돌아가 차나 홀짝거리며 평온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원아와 소비 진 씨가 죽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인가!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피가 그의 손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을 보고 숨이 턱 막혔다.
그는 자신이 참으로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소미의 말대로 굶어 죽는 백성이 수없이 많다고 말했을 때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더니, 이제 설지가 죽는다니까 갑자기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물론, 가까운 사람을 먼저 챙기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워낙 충격적으로 다가와서 냉정하게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다.
세상을 안다는 게 이런 것일까? 그가 사는 세상이 정녕 이렇단 말인가? 세상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 뒷감당은 어렵다. 알면 알수록 더 괴롭기 때문이다! 그는 속이 쓰렸다. 모르고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슴을 꿰뚫려 피를 철철 흘리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정말 세상이 이런 것이라면 옳은 일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설지와 같은 백성이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녀와 같은 백성이 없게 만들 수 있다면 영웅이 되는 것도 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천천히 령령과 허명을 떠올렸다. 과연 령령과 허명이 그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을까?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스스로 대답을 찾지 못한다면 마음 내키는 대로 길을 간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대답을 찾기 위해 보름 가까이 취영루를 들락거렸다. 어차피 하는 일이라고는 방에 틀어박혀 설지와 술을 마시는 것뿐이었으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전에 찾아와 밤늦게 업혀 가니, 취영루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재미 삼아 그에게 별호를 지어 주었고 어느 날, 설지가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불쑥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공자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벌써 얼큰하게 취한 그는 혀가 꼬이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라고 부르는데?”
“호색공자(好色公子)!”
그녀는 참을 수 없는 듯 깔깔 웃으며 배꼽을 잡았다.
“호색공자라고 불러요.”
입을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녀는 곧 피가 흥건한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웃음을 거둘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그는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며 술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 by | 2006/10/10 12:11 | 친왕록(親王錄) | 트랙백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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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님 홈피 아주 잘꾸미셨네요...이렇게 사람이 살아있다는것은 좋은겁니다...
엊그제 롯데마트 중계점에 20년만에 아르바이트 갔었는데 사는게 전부들 열심이더군요...
20년만에 외출해서 가게에 도움은 되었지만 갈수록 경기는 안좋군요...책은 친왕록 참 좋더군요...
빠른완간하셔서 서점에 도움좀 주시길 ㅎㅎㅎ 언제 의정부 오실일 있다면 가능우체국옆에 서점있어요 ㅎㅎ
오시면 차한잔하고 점심은 책임지지요 늘 건강하시길 바래요 ...의정부 사기꾼대표가...
두고두고 보면서 참고하기 위해 링크 걸었습니다^^;
연중된지 어느새 3년이 흘렀네요. (조알 기준)
시간 참 빠른 것 같습니다. 벌써 3년이라니...
언젠가는 완결을 내주시길 바라며....
친왕록 기다리다 제 목이 다 길어질 것 같습니다. 저도 쓰던 글 생계=포도청 덕분에 연중하고 우울한 심정으로 지내는 터라 독촉할 자격이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친왕록처럼 좋은 글은 반드시 완결을 보고 싶습니다.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