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3월 16일
◀검은 날개▶2부-18편-정략결혼
◀검은 날개▶2부-18편-정략결혼
기사들은 모이기만 하면 공중요새와 신의 의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전쟁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알 수 없는 하늘에서의 일이 머릿속을 완전히 점령해 아이들처럼 들떠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왜 그것들이 이곳에 나타났는지, 왜 싸우다 말고 사라져버렸는지 알 수 없었기에 온갖 추측을 뿜어댔다.
그들은 공중요새가 신의 의지를 사라지게 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공중요새는 이미 휴식왕의 군대를 대신하여 털북숭이를 전멸시킨 전례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기사들은 뭔가 꿍꿍이를 가지고 나타난 신의 의지를 공중요새가 방해했고, 그래서 신의 의지는 도망쳐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공중요새가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우리 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신의 의지의 진짜 목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공중요새의 방해 때문에 사라진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 소식은 다음날 점심 식량을 운반해온 전령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노예들에게 기사들에 대한 식량 배급을 명령하고는 천인대장의 옆에 엉거주춤 서서 살며시 귓속말을 건넸다. 그러나 천인대장은 귓속말로 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지 걸걸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털북숭이가 수도로 모여들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여기서 짐승의 산맥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데? 그동안 지방의 귀족이나 다른 왕국은 그저 넋 놓고 보고만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우리 뒤만 졸졸 따라왔단 말인가?”
전령은 다시 귓속말을 할 생각인 듯했지만, 주위의 기사들이 그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사들은 매일 계속되는 건물의 수색과 거리 바닥에서 찬 돌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식사를 하는 중이라 신경이 매우 날카로운 상태였다. 칼을 날아오진 않더라도 먹고 있는 뜨거운 국물 정도는 전령의 얼굴에 막 날아들 참이었다. 게다가 깊은눈은 옆에 놓인 칼을 만지작거리며 어서 입을 열라고 압력을 넣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휴식왕의 아들 검은빛. 그가 눈을 치켜뜨자 입맛을 다시며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성질을 건드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제부터 이상한 낌새가 포착되었습니다. 뒤쪽에 있던 정찰병으로부터 털북숭이가 목격된다는 소식이 계속 전해져 왔었던 것이지요. 수도까지 털북숭이가 출몰한다는 얘기는 거의 듣지 못했기에 휴식왕과 가람님은 하늘에서의 일도 포함하여 계속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저녁쯤에 털북숭이의 조사를 위해 대규모 정찰병이 흩어졌지요. 그리고 오늘 아침에 보고가 이뤄졌는데...”
“이뤄졌는데?”
천인대장은 씹고 있던 것을 퉤 뱉으며 물었다. 그뿐만 아니라 뭔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모두에게 휘감기고 있었다.
“두 분은 엄청나게 많은 수의 털북숭이들이 이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별로 큰 무리도 짓지 않고 마치...”
전령은 적당한 예를 찾기 위해 끙끙거렸다.
“마치?”
“왕궁에서 기사 소집령, 아니 털북숭이 소집령을 내린 것처럼 사방에서 털북숭이들이 수도를 향해 올라오고 있다는 겁니다. 원래 있던 곳에서 하고 있던 짓을 그만두고 이쪽이 급하다는 듯이 허겁지겁 몰려들고 있다는 것이죠. 흩어져서 오고 있긴 하지만 그 수가 엄청나서 근처에서 큰 무리를 만들 것으로 보입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하라고 한 것처럼...”
“누군가가?”
“예.”
“신의 의지?”
“예, 두 분께서도 그렇지 않을까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결국 신의 의지는 일없이 나타났다가 그 공중요새에게 쫓겨난 것이 아니란 얘기죠. 신의 천사 즉, 털북숭이에게 이 근처로 모이라고 하고는 공중요새와 적당히 놀아주고 사라졌다고 하는 것이 두 분의 추측이죠.”
무거운 침묵이 모두의 뒤통수로 내려앉았다. 전령의 말이 진실이라는 가정 하에 놀리는 이 행동은 많은 이들을 무기력감에 빠지게 만들었다. 직접 상대할 필요조차 없다는 식이었기 때문에 모멸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신에게 인류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기사들은 공중요새가 신의 의지를 쫓아버릴 때 느꼈던 환희의 감정이 차갑게 식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의 신이 인류를 멸망시키려고 한다면 인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도무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늘의 일은 하늘의 일이고, 땅의 일은 땅의 일이었다. 기사들은 왕궁 쪽으로의 진군을 계속했다. 건물 하나하나를 수색하고, 거리에 거점을 세우고, 저항하는 시민병을 몰아내면서 왕궁 쪽으로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천인대장의 예상대로 사흘째에는 왕궁에 거의 다다를 것 같았다.
깊은눈은 여느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수색하기 위해서 항상 건물을 오르락내리락해야했고, 밤에는 찬 바닥에서 자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서리가 내려 손가락이 몹시 시렸다. 이런 때에 점점 기분이 좋아져 가는 사람은 검은빛 하나뿐이었다. 그는 신기하게도 왕궁을 바라보면서 추억에 젖은 듯 불길한 미소를 지으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왕궁의 사람들을 모두 죽일 생각이십니까?”
깊은눈은 창가로 멀리 왕궁을 바라보는 검은빛에게 물었다. 그는 피곤해서 예의를 차릴 생각은 이미 저리 달아난 상태였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은 그는 몰래 가져온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약간 취한 상태였다. 하지만 검은빛 역시 품속에서 마약을 꺼내 코끝으로 들이키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의 품속에서는 마약이 끊이지 않고 나왔다.
“너는 바보인가? 나는 다 죽일 거야. 왕궁 안에 있든, 밖에 있든.”
검은빛이 퉁명스레 대꾸하자 그는 눈이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일단은 말이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검은빛님의 말씀을 허무맹랑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무 일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진짜 현실로 다가오게 되면 검은빛님은 굉장히 위험해질 겁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왕궁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게 되면, 신을 죽이기 위해 모든 인류를 없앨 것이라는 검은빛님의 말씀이 더 이상 농담이나 포부가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살해위협으로 다가가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된다면 검은빛님은 휴식왕께서 왕이 되신다 해도 왕자의 지위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어쩌면 다시 장서실에 갇힐지도 모르고, 재수가 없으면 목숨을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 천인대장의 경우, 할 수만 있다면 뒤에서 칼을 내리칠 사람이죠.”
“그래서?”
“저도 정치란 것은 잘 모릅니다. 하지만 뒤를 돌봐줄 같은 편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쯤은 알고 있죠. 그러나 검은빛님에게는 사람이 없습니다. 야망을 드러낼 경우 여기저기서 방해를 받아 고생하기에 딱 좋은 상황이죠.”
“너는 신을 죽이겠다는 내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하나?”
“그것에 대한 판단은 보류하겠습니다. 제가 검은빛님의 곁에서 겪은 일이 제 판단력을 많이 흩트려놓았으니까요. 문제는, 선악이나 성패의 여부를 떠나 역사에 남을 일이란 것이죠. 제 이름을 떨치기에도 그만이겠죠. 하지만 우선은 많은 사람 사이를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 골치 아픕니다.”
그는 술병을 짤랑짤랑 흔들었다.
“일단은 마음을 숨기십시오. 항복한 왕궁의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아량을 베풀어 검은빛님의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그 외의 사람을 차근차근 제거하고 힘을 길러야 합니다. 무엇이든 검은빛님의 말씀대로 될 때까지.”
그는 진심이었으나 검은빛은 후후 웃을 뿐이었다. 그는 부스럭거리며 약을 품안에 집어넣고 창가에 기댔다.
“너도 알고 보니 야망이 대단하군. 미안하지만 왕궁의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야. 그 일을 할 사람은 따로 있지.”
“...”
깊은눈은 그 일을 할 사람이란 게 누구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아서 입을 다문 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피곤함 때문인지 머리가 띵해져서 적절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일을 할 사람이 누구죠? 내가 모르는 사람인가요?”
“사람? 사람이라... 하긴, 내가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야.”
검은빛은 약 기운에 몽롱해지는지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그들을 늘 따라다니던 기사 둘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입맛을 다시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들의 임무는 아마도 호위와 감시, 두 가지 모두이겠지만 호위와 감시의 대상이 전혀 그들을 의식하지 않고 대놓고 이야기를 하니 적잖게 민망했던 것이다. 적어도 그들의 대장인 천인대장에 대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여겼을 것이다.
“누가 우리를 여기에 있게 했을까?”
“누가?”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어떤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쪽 눈이 없기 때문에 붕대를 얼굴에 감고 다니는 짐승. 가끔 알 수 없는 말과 행동으로 혼란스럽게 하는 예언가. 그녀는 장서실의 검은빛을 휴식왕에게로 이끌었다. 하얀어둠이 세웠다는 계획을 기억하고 있어서 때가 되면 하나하나 늘어놓았고, 그것은 기가 막히게 척척 들어맞아 휴식왕에게 엄청난 힘을 안겼다. 그리고 그녀는 악착같이 검은빛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그렇다면 그녀가?”
“영혼을 나에게 팔아버린 대가!”
검은빛은 자신의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난 그녀를 대신하여 복수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그녀를 이용할 수 있었지. 왕궁의 사람을 죽이는 일은 그녀의 일이다.”
깊은눈은 술이 퍼뜩 깨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일개 노예가 왕궁의 사람들에 대한 생사여부를 결정한다? 심하다는 표현을 넘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머리를 굴려 그 일에 대한 부당성을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건물 밖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불렀다. 저녁이라 날은 쌀쌀하고 어두워져 있었다. 깊은눈은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에서는 전령이 두 기사와 함께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두 분 모두, 휴식왕께서 찾으십니다.”
전령은 약간 들뜬 목소리였다.
“털북숭이 때문인가?”
“아닙니다. 실은...”
전령은 목소리를 약간 낮추더니 건물 벽에 바싹 붙어서 말했다.
“전쟁이 끝날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왕궁 측의 전령이 와서 화의(和議)를 요청했습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들도 수도 주위의 일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모양인지 털북숭이에 대항해서 같이 싸우자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더 우선이라는 것이죠.”
“휴식왕께서 받아들였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왕궁이 풍전등화인 것은 사실이지만, 일단은 성벽에 보호를 받지 못하고 야영하고 있는 것은 우리 쪽이니까요.”
“기사단장 녀석, 머리를 잘도 쓰는군.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걸?”
검은빛이 불쑥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는 팔짱을 껴서 창틀에 기대고는 재미있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유리한 마당에 특별한 계기도 없이 그냥 응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기사단장은 뭘 내놓았기에 그렇게 빨리 화의 요청을 받아들였지? 우리와 잠깐이라도 화의를 하려면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할 텐데, 그놈이 가진 것이라도 있나? 돈? 땅? 노예? 그건 우리도 많이 있어.”
“그게...”
전령은 잠시 더듬거렸다.
“기사단장은 딸을 내놓을 것 같습니다.”
깊은눈은 눈살을 찌푸렸다.
“딸을 내놓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입니다. 기사단장은 진심으로 화의를 할 생각이 있다는 뜻으로 딸을 내놓겠다고 했다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차리지 못한 깊은눈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인질? 인질로 보내겠다는 것인가?”
“아닙니다.”
전령은 난처하게 검은빛을 힐끔 쳐다보았다. 해서는 되지 않아야 할 말을 하는 것처럼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도망칠 것 같은 표정으로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는... 화의를 오래 끌 모양입니다. 검은빛님과의 정략결혼을 요청했습니다.”
검은빛은 한참이나 웃고 있었다. 아니 웃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어이가 없는 듯 했으나 나중에는 누구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깔깔댔다. 그의 웃음소리는 저녁 하늘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고작 한다는 생각이 나를 장가보내는 것인가? 나는 인간과 마인 사이에서 태어났을 뿐인데, 악마라고 낙인찍고 손가락질하며 장서실에 가두더니 이제는 나를 사위로 맞겠다고? 정말 제멋대로군!”
깊은눈은 그가 그렇게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는 늘 불만이 있거나 짜증이 난 얼굴이었고, 그것은 주위의 사람까지 전염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그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웃음은 전혀 그답지 않은 면이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깊은눈으로서도 기사단장의 선택은 검은빛을 웃게 만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일에 대해서 의논을 하시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민망한 전령은 이성을 상실한 검은빛에게 무슨 일이라도 당할까 봐 눈치를 살피다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사라졌다. 그때 웃음을 뚝 그친 검은빛은 한참이나 생각에 빠져 있었다. 기사단장에 대해서 생각하는지, 결혼에 대해서 생각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일단은 휴식왕께 가시지요. 의논을 해봐야 할 것 아닙니까? 이 상황에 화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면 털북숭이 쪽도 심상치 않는 것 같습니다.”
“의논? 무슨 의논? 아버지는 내 의견을 묻고 싶은 게 아니야.”
“...”
“말하는 짐승... 짐승의 의견을 듣고 싶은 거야.”
그는 약간 무뚝뚝하게 말했다. 넷? 깊은눈은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넷은 한낱 계집노예일 뿐이기도 하지만, 휴식왕에게 힘을 준 은인이기도 했다. 모든 계획의 중심, 모든 결정의 중심, 그것이 바로 넷이다. 잠깐 어이없었던 검은빛은 이제야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어쨌든 가야겠군.”
그는 약 기운이 깬 듯 건물을 날듯이 빠져나갔다. 전령은 말 두 마리를 이미 준비해놓고 있었다. 오랜만에 타는 말은 약간 익숙하지 않았지만 둘은 거침없이 휴식왕의 야영지로 달려갔다.
휴식왕은 초조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천막 앞의 불 앞에서 서성이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가람은 그 옆에 서있긴 했지만 달리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중대한 결정의 순간임은 분명했다. 이대로 밀어붙이면 틀림없이 왕궁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털북숭이로부터 전멸당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털북숭이는 이제껏 뿌리쳐왔던 규모와는 양적으로 달랐다. 거의 3천에서 5천 마리에 이른다는 것이 정찰병의 보고를 종합한 후의 결론이었다. 이 정도라면 작은 왕국 정도는 순식간에 허허벌판으로 만들 숫자였다. 결국 신의 의지가 일없이 수도의 하늘을 얼쩡거리진 않았던 것이다. 미적거리고 왕궁이나 공격하고 있다가는 뒤를 물려 3년간 공들였던 만 오천의 기사들이 놈들의 식사거리로 전락할 참이었다.
다행인 것은 왕궁 역시, 휴식왕의 군대와 대규모 털북숭이라는 두 악재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두 적 중의 하나와 동맹을 맺고 나머지 적을 물리치자고 제안해 왔다. 인류는 이제 인류를 벌하려는 신의 천사, 털북숭이 앞에서 동맹을 해야 하는 형편인 것이다. 기사단장은 동맹을 위해 딸을 내놓겠다고 했다. 휴식왕으로서는 이것이 기회인지, 아닌지 그는 몹시 궁금했다.
그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으로는 현관에서 빗물로 지도를 그리던 넷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말하는 짐승일 뿐이지만, 실상 그 이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언제나 옳았고, 미심쩍어 하면서도 하얀어둠의 계획이란 말에 기대감을 가지고 그 말을 따랐던 휴식왕은 단숨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이제 다시 한 번 그녀의 자리를 증명할 시간이었다.
검은빛과 깊은눈은 말을 한쪽에 세워두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들은 약간 피곤한 듯 했다.
“불가에 앉으라.”
휴식왕은 자리에 앉으며 탁자에 지도를 탁 올려놓았다. 이글거리는 불빛으로 조잡한 지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것은 정찰별의 보고를 토대로 만든 지도였는데 정확성이 좀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래, 제4천인대는 어디까지 점령했지?”
휴식왕은 지도를 내밀었다. 깊은눈은 잠시 지도를 살펴보고 나서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거리의 끝까지 기사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내일쯤이면 외성 근처까지는 갈 수 있겠군. 하지만 외성을 넘는다고 해도 하루 걸려 내성까지 또 가야 하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가람?”
가람은 망토를 둘러쓰고 있었는데 그것을 확 젖힌 그는 한참이나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리를 가늠하고, 잠시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더니 말했다.
“외성을 돌파하려면 적어도 사흘, 하루 걸려 다시 내성, 거기서 다시 사흘 동안 내성 공격... 왕궁을 완전히 점령하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소요됩니다. 하지만 털북숭이들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죠. 확실히 야영하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몹시 다급한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왕궁으로 당장 들어가서 성벽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형편도 아닙니다.”
“왕궁 쪽은 어떤가?”
“꼬리에 불이 붙은 것은 그쪽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우리를 막아낸다고 해도 대규모의 털북숭이와 다시 싸워야 하죠. 병력이 부족한 그들은 둘 중 하나도 막기 힘든 형편입니다.”
휴식왕은 지도를 잘 접어서 품안에 넣었다. 그는 노예들에게 명령하여 마실 것을 데워 오라고 했다. 모두들 팔짱을 끼고 있는 가운데 탁자에 마실 것이 놓이자 휴식왕은 잔을 들어 손을 녹였다.
“들었을 테지만, 기사단장이 화의를 요청해 왔다. 상황이 이러니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들로서는 시간을 버는 셈이지. 대단히 영악한 놈이야. 그는 화의에 대한 증명으로 막내딸을 검은빛과 결혼시키자고 했다. 나도 일단 교섭은 해보기로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의견이 있으면 말해보라.”
“화의가 급하긴 급한 모양이군요. 막내딸까지 내주겠다고 하다니...”
깊은눈은 혀를 쯧쯧 찼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까?”
“그렇다고 화의를 거절하면 털북숭이에게 각개격파당하고 말 것이다. 처음은 우리, 그 다음은 왕궁이겠지.”
가람은 우울하게 말했다.
“우리는 성벽이 필요하고 그쪽은 병력이 필요해. 하지만 서로를 믿을 수는 없다. 기사단장 놈은 그 점에 유의하고 정략결혼을 요청해 왔다. 우리가 응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손을 쓴 셈이지.”
“결혼을 하는 것은 너다. 너의 의견은 어떠하냐?”
휴식왕은 잔에 든 것을 한 모금 마시고 탁자에 탁 놓았다. 그러자 모두의 눈길이 검은빛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너머에 있는 넷에게 향해 있는 것이다.
“넷! 넷! 어디 있나?”
그는 갑자기 소리쳐 물었다. 그러자 근처의 천막 뒤에서 누군가가 부스럭거리며 나타났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붕대에 감긴 얼굴, 허름한 옷차림... 넷이었다. 그녀는 뭔가 대단히 불안한 눈빛으로 어기적어기적 검은빛의 옆으로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이야기를 다 들었겠지?”
“아니에요. 하나도 듣지 않았습니다. 믿어주세요. 그냥 근처를 지나가다가...”
검은빛의 발바닥이 그녀의 어깨를 내리치자 그녀는 한 바퀴 굴러 나뒹굴었다. 그는 얼굴빛 하나도 바꾸지 않고 다시 물었다.
“다시 한 번만 더 묻겠다. 다 들었지?”
“네... 네, 다 들었습니다.”
그녀는 다시금 검은빛의 옆에 엎드렸다.
“좋아. 네 덕분에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것만은 인정하지. 그리고 너도 복수에 많이 다가갔다. 난 흡족할 정도로 네 손에 피를 묻혀줄 생각이다.”
“제 손에 피를?”
“흡족할 때까지... 어차피 왕궁의 한 사람도 살려둘 순 없다. 그 일을 네가 하는 것이다. 어때? 기쁘지 않나?”
검은빛은 얼굴을 불쑥 내민 채 그녀의 감상을 묻듯이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천천히 들어 믿기지 않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왼쪽 눈알을 빼버려야 했던 손, 이제 가족과 언니의 복수를 할 수 있다! 이 손에 피를 가득 묻히고 지금껏 견뎌왔던 고통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녀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짐승이라도 심장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뜨거운 심장이... 그녀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잠깐 스쳐 지나갔다.
“예, 기쁩니다.”
“좋아. 그런데 보시다시피 문제가 좀 생겼다. 좋은 생각이 있나?”
넷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결심이라도 하는 듯 했다. 그녀는 어깨를 쭉 펴고 검은빛을 올려다보았다.
“결국은 나리들이 하루 빨리 왕궁으로 들어가 성벽의 보호를 받으면서 털북숭이와 싸울 수 있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 하지만 우리와 기사단장은 서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기사단장은 정략결혼이라는 카드를 꺼냈지만, 어차피 시간벌기용일 뿐이다. 이 점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우리로서는 별로 마음에 안 드는 선택이지.”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모두의 눈이 그녀의 입으로 향한 상태였다. 정말 이 계집노예가 좋은 생각을 해낼 수 있을까. 말하는 짐승일 뿐인 그녀가 과연 그들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까? 그녀는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저에게 약속해 주세요. 정말 제 손에 피를 묻힐 수 있게 해주실 건가요? 그것도 제가 원하는 만큼?”
“약속한다. 네 손에 피를 원하는 만큼 묻힐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를 노예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다. 너를 다시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다.”
넷은 한참이나 눈알을 굴렸다. 그리고 휴식왕과 가람, 깊은눈 마지막으로 검은빛을 쳐다보았다. 이글거리는 불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상당히 굳어 있었다.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의 제안을 역이용하여 모래 아침까지 나리들을 왕궁으로 들여보내겠습니다...”
“뭐라고?”
설마하고 숨을 죽이던 깊은눈은 경악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밤은 깊어가고 불은 점점 더 타오르고 있었다. 넷은 찬찬히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았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네 사람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기사단장의 제안을 역이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허를 찌르는 정도였다.
“너는... 너는 원래 백성이었는데 어떤 일로 인하여 노예가 되었다고 들었다. 그것이 사실이냐? 나는 믿을 수 없다. 너는 검은빛님과 내가 털북숭이에게 몰렸을 때 말을 타고 우리를 도우러 왔었다. 아무리 부자였다고 해도 평범한 백성이 말을 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너는 모든 점이 이상해. 너무 많이 알고 있고, 너무 똑똑해. 너는 도대체 누구지?”
깊은눈은 더듬더듬 물었다. 휴식왕은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또한 그녀가 누군지 궁금해 죽을 정도였다. 언젠가 그녀는 자신을 ‘운명의 여신’이라고 했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그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우리를 올려다보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내려다보고 있는지도 몰라. 하지만 이즈음 그녀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입은 검은빛의 명령이 아니면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검은빛을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검은빛만은 두려워한다는 사실이 우스꽝스러울 지경이었다. 영혼을 팔았다... 그것이 족쇄가 된 것일까.
가람이 갑자기 헛기침을 했다. 그 순간 깊은눈은 자신이 주제넘었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도 낮게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숙인 후, 자리에서 물러나왔다. 그는 아마 오늘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다.
“내일 정략결혼에 대한 협상이 시작될 것이다. 재미있는 시간이 되겠군.”
휴식왕은 넷을 잠깐 바라보다가 의미 있는 웃음을 지었다.
밤 동안 양쪽의 전령이 끊임없이 왕궁과 휴식왕의 야영지를 드나들었다. 정략결혼에 대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 협상은 오래 끌지 않았다. 지금 급한 것은 왕위를 사이에 둔 전쟁이 아니라 털북숭이로부터 살아남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협상은 일사천리로 끝났다.
다음날 점심 무렵에 자신을 ‘근위대장’이라고 소개한 기사 하나와 기사단장의 직속부하 네 명, 그리고 정략결혼의 당사자인 신부의 사촌언니라는 아가씨와 계집노예 두 명이 휴식왕의 천막 근처를 찾아왔다. 주위의 기사들이 웅성거리며 그들을 주시하는 가운데, 근위대장과 아가씨는 휴식왕과 검은빛 그리고 가람과 깊은눈을 마주하고 원모양의 탁자에 앉았다.
날씨는 많이 포근해져서 추위를 느낄 수 없을 정도였고, 그 때문인지 아가씨는 화사한 옷을 입고 있었다. 말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리고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놀러온 귀족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아가씨는 새침한 듯 치마를 추스르더니 계집노예의 도움으로 자리에 앉았다. 뭔가 몹시 못마땅한 얼굴은 무례할 정도로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아마도 검은빛이 누구인지 가늠하는 것 같았다.
휴식왕이 왕궁을 떠난 지 십 수 년... 기사단장과 사이가 틀어진 것도 그 이상의 세월이 지난 셈이었다. 그는 한때 기사단장이나 그 친척의 자식들을 본 적이 있었으나 다들 꼬맹이들이었을 때의 일이었고 지금은 약간 생소한 편이었다. 하지만 곧 아가씨의 얼굴에서 기사단장의 모습이 얼핏 비치는 것을 발견하고는 약간 불쾌해졌다. 친척이니 어느 정도 닮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휴식왕으로서는 기사단장을 직접 마주한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봬요, 아저씨...”
아가씨도 휴식왕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머리를 숙여 인사하며 이쪽의 분위기를 떠보았다. 어린 시절, 그녀도 기사단장과 마주 앉아있던 휴식왕을 자주 보았으니 이러한 인사가 무리는 아니었으나 어투는 약간 빈정거리는 것 같았다.
“많이 컸구나. 마지막에 보았을 때 너는 굉장한 개구쟁이였던 것 같은데, 이제는 아가씨가 되었군.”
“십년도 넘게 지났잖아요.”
아가씨는 자신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쪽이 내 아들, 이쪽은 가람, 그리고 이쪽은 가람의 아들, 깊은눈이다.”
휴식왕은 검은빛, 가람, 깊은눈 순으로 손수 소개했다. 하지만 아가씨의 눈은 검은빛에게 꽂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팔기 위해 나온 장터의 노예처럼 그를 위아래로 자세히 살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분위기가 정말 우울하군. 그녀의 감상은 이것뿐이었다. 솔직히 지금 당장이라도 왕궁으로 달려가 신부에게 도망치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머리가 텅텅 비고, 정신 나간 귀족들은 사람의 내면을 못 본다고 하더군.”
검은빛의 차가운 말은 인사 대신이었다. 그는 능글거리는 웃음을 잠깐 짓다가 관심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멀리서 미래가 이쪽을 보고 웃는 것을 지켜보았다. 미래는 불편한 다리로 절룩거리며 뛰어다니다가 손을 흔들곤 했는데 아마도 나비를 쫓아다니는 것 같았다.
“사람의 내면은 보기 싫어도 보이더군요. 겉모습에 투영되기 때문이죠.”
아가씨는 팔짱을 끼더니 코웃음치고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녀도 이제는 더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짜증나고, 한심하고, 불만스러웠다. 정략결혼이므로 애초에 기대한 것은 없었지만, 막상 검은빛을 보고 나니 신부에게 성벽에서 뛰어내리라고 조언하는 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검은빛은 정략결혼을 감안하더라도 최악의 신랑이었다. 악마라는 소문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암울한 현실,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인사가 대충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볼까?”
휴식왕은 탁자에 마실 것이 내려지는 것을 보고 물었다.
“그렇게 하시지요, 전하.”
근위대장은 흥미로운 듯 몸을 앞으로 약간 내밀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악마라고 불렸던 검은빛을 떠보고 싶었으나 그가 관심도 없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결혼식은 내일 아침 해가 뜨자마자, 장소는 외성의 해자 위 성문다리에서, 양측은 각각 비무장의 상태로 다리 위로 올라올 수 있고, 나머지 기사들은 100미터 이상의 거리를 두고 뒤쪽에 있을 것, 결혼식은 신랑이 외성으로 들어와 신부를 데리고 나가면 끝나며 왕국 측은 내성으로 철수, 그와 동시에 휴식왕께서는 외성으로 들어오시게 됩니다. 털북숭이와의 싸움이 끝나면 중립적인 귀족을 초청하여 왕위에 대하여 협상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휴식왕은 고개를 저었다.
“해뜨기 한 시간 전에 미리 신부를 우리에게 넘길 것, 해가 뜨면 각각 비무장의 상태로 외성 문에서 약 5백 미터 거리에 있는 광장에서 결혼식을 실시, 결혼식 동안 나머지 기사들은 50미터의 거리를 두고 뒤쪽에 배치한다... 형식 상,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기사단장과 나에게 인사하면 결혼식은 끝나며 왕국 측은 내성까지 철수, 우리는 외성으로 진군하여 성문을 닫는다. 우리는 성벽을 얻고 자네들은 왕궁을 지킬 병력을 얻게 되지. 이건 어떤가?”
“그것은 마치, 우리를 밖으로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 같군요.”
근위대장은 약간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자네들이 마음만 먹으면 성벽 근처, 망루나 성문 위에 궁수를 배치하여 우리를 저격할 수 있다. 비무장으로 해자의 다리 위까지 오른다는 것은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뜻이지. 그렇게 따지자면 자네들은 우리를 안으로 들이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은 서로가 안심할만한 중간지점이 필요하단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신부를 한 시간 전에 넘기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자네들은 신랑더러 안까지 직접 와서 신부를 데려가라고 하지만, 그 방법은 마음만 먹으면 신랑을 인질로 잡을 수 있을 것이네. 그러므로 신랑을 혼자 들여보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어차피 우리 쪽에 올 신부니까 그쪽에서 미리 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텐데?”
근위대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한참을 끙끙거리더니 옆에 있던 아가씨와 잠깐 귓속말을 나누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있던 기사를 불렀다.
“들은 대로 전하고, 기사단장의 승낙 여부를 확인받게.”
그가 손짓을 하자 그 기사는 흰 깃발을 든 채로 왕궁 쪽으로 달려갔다.
“전하, 제가 함부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니 좀 기다려야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휴식왕은 느긋하게 말했다.
“그럼 식사나 할까?”
가람이 손뼉을 치자 노예들이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음식이라고 해봤자 전쟁터이니 별 것 없었다. 빵, 삶은 고기, 쭈글쭈글해진 과일, 떡, 뜨거운 물에 부풀린 마른 고기 등이었다. 이만하면 그래도 꽤 괜찮은 식사인 편이었으나 아가씨는 여기서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전쟁터라지만 이건 너무하군요. 아침노을이라면 견디지 못할 거예요.”
그녀의 말은 도도한 귀족의 억지일 뿐이었다. 만약 그녀가 적어도 평범한 백성의 식사를 보았다면 구역질을 하고 결국은 토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평생을 대접만 받고 살아온 그녀가 그러한 것을 알 리가 없었다. 투덜거리며 입을 삐죽거린 그녀는 검은빛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음을 알았다.
“불평이 아니에요. 사실을 말하는 것이지.”
그녀는 손을 내젓고 식사를 하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검은빛은 그녀의 손을 확 낚아채더니 그릇을 두어 개 엎어버린 채 물었다.
“다시 한 번 말해 봐! 뭐라고?”
“으... 아파요! 놔요!”
아가씨는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그가 워낙 꽉 붙잡고 있어서 잘 되지 않았다. 이마를 완전히 구겨버린 그녀는 그의 성질을 잘못 건드렸다고 판단하고 사과하려고 했다.
“미안해요... 그냥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었지, 빈정대거나 깔보려는 건 아니었어요.”
“다시 말해 보라고! 누가 견디지 못한다고?”
그는 그녀를 잡아당겨 귀에다 대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모두의 눈이 동그랗게 변해버렸다. 그는 무시하는 타입이었지, 화를 내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에 깊은눈의 놀라움이 가장 컸다.
“검은빛님... 일단 손을 놓고 이야기 하시지요. 아가씨가 자세히 말씀드릴 겁니다. 그렇지요?”
그가 달래듯이 이야기하자 검은빛은 그를 돌아보더니 뿌리치듯이 손목을 놔버렸다. 신음소리와 함께 손목을 문지른 아가씨는 약간 겁먹은 표정으로 낮게 말했다.
“아침노을이라면 견디지 못할 거라고...”
검은빛은 꽝! 탁자를 내리쳤다. 덕분에 탁자위에 있던 음식이 한 바탕 튀어 올랐다.
“아침노을이라고?”
“그래요, 아침노을. 제 사촌이죠. 기사단장의 막내딸이기도 하고, 당신의 신부가 될 불쌍한 여자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아가씨는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탁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도도함을 찾았다.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핵심을 찔러갔다.
“당신은 당신의 신부가 될 여자의 이름도 몰랐군요? 정말 한심해요. 어떻게...”
“데리고 와 봐!”
잠시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갑자기 다시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아가씨는 잔뜩 겁을 먹고 말았다. 그녀는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검은빛이라는 사람이 어떤 녀석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휴식왕과 가람은 자주 겪는 일인 듯 그냥 식사를 하고 있었으나 근위대장과 그녀는 놀라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데리고 와 보라고! 그녀가 아침노을인지 아닌지 알아보겠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당신이 그녀를 알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당신은 장서실에만 있었다고... 혹시 다른 사람하고 착각하는 거 아니에요?”
그녀는 여전히 겁먹은 얼굴로 내던지듯이 물었다. 그러자 갑자기 정신이 든 검은빛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내뱉었다.
“그렇군.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착각했군.”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자리에 앉아 고기를 집어서 입에 넣고 질겅거리며 씹었다. 아가씨는 검은빛이 제정신인지 의심이 들었다. 일부러 그러지 않는다면 분명히 미친 남자가 틀림없었다. 소문처럼 악마가 아니라 미친 남자인 셈이다.
“어쨌든 데려와. 칼 손잡이를 쥐고 있는 것은 이쪽이다.”
그가 명령하듯이 말했기 때문에 아가씨는 몹시 기분이 나빴다. 이런 무례한 사람과는 더 이상 상종하고 싶지도 않았고,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냥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그를 피하기로 했다.
오후가 되고 전령들이 돌아가자, 검은빛과 깊은눈은 털북숭이를 정찰하기 위해서 수도의 외곽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일단 교외의 한쪽을 둘러보기로 했다. 말을 달려 야영지에서 멀지 않은 나지막한 산을 넘었고,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가 나중에는 서쪽으로 나아갔다. 둘은 얼마 가지도 않아서 꽥꽥 소리를 내면서 이동하고 있는 털북숭이 서너 마리를 발견했다. 그놈들은 부지런히 길을 가는 모양인지 검은빛과 깊은눈을 발견하지 못했다. 둘은 말에서 내려 언덕에 납작 엎드렸다. 그 털북숭이들은 거의 5미터에 이르는 돌연변이 녀석들로, 바람이 살짝 불자 고약한 냄새가 멀리까지 풍겨왔다.
“요즘 들어서 돌연변이가 너무 많은 것 같군요.”
깊은눈은 손가락으로 코를 잡았다. 만약 바람이 반대쪽으로 불었다면 놈들은 둘의 위치를 냄새로 알아내고 공격해 왔을 것이다. 흙에 뒹굴어 냄새를 없앤다 하더라도 히힝 울고 있는 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단점이었다. 털북숭이가 뛰는 속도는 거의 말에 필적할 정도였는데 오늘은 어느 정도 행운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만약 재수가 없었다면 목숨을 걸고 싸우거나 꽁지가 빠져라 도망쳐야 했을 것이다.
“털북숭이가 강해지고 있다는 것은 인류도 그만큼 강해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검은빛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고, 깊은눈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신이 지금 신의 의지를 앞세워 첫 번째와 두 번째 인류를 멸망시켰던 것처럼 단번에 끝장을 내지 않고 시간을 질질 끄는 이유가 따로 있다고요. 얼핏 털북숭이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도 아니죠. 만약 털북숭이를 이용해서 인류를 멸망시킬 생각이라면 단번에 꼬마보다 더 크게 만들어서 인류를 짓밟게 했을 테니까요. 신은 두 번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은 겁니다. 이른바 삼세번이라는 것이겠지요. 인류를 멸망시켜봤자 언젠가는 다시 도전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른 방법을 연구한다... 이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만약 또다시 신의 의지로 인류를 멸망시키면 살아남은 네 번째 인류 역시, 신에게 도전하겠지요.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신은 인류를 멸망시키고, 인류는 신에게 도전하는 그러한 일이 계속 되풀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다고 신으로서는 도전하는 인류를 귀찮다고 완전히 쓸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 고리를 끊어야 하는 숙제를 떠안게 된 것이죠.”
“그럴듯하군. 보기보단 똑똑한데? 그래서?”
“만약 인류가 신의 의지에 의해서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이유로 자멸해버린다면 어떨까요? 그래도 네 번째 인류의 분노 역시 신을 향하게 될까요?”
“네 말은 신이 인류를 멸망시키고 싶은 마음은 있되, 그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냐?”
깊은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보다는, 자신이 탓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네 번째 인류가 언젠가 다시 도전하게 될 이유나 원인을 없애버리는 것이죠. 도전과 멸망이라는 악순환을 끊어버림으로서 신도 간간히 인류를 손봐야 하는 귀찮고, 골치 아픈 일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신은 어떻게 하려한다고 보느냐?”
“인류가 자멸하게끔 적당한 무대에 올려주는 것이죠.”
“자멸?”
“인류가 자멸하면 신의 탓으로 인류가 멸망한 게 아니니까 살아남을 네 번째 인류는 신에 대한 도전의 정당성을 상실할 겁니다. 그래서 저는 두 마리의 용에 대한 소문이 신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봅니다. 그 두 마리의 용은 어쩌면 특정 인류를 가리키는 은유일지도 모르죠.”
그는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검은빛을 쳐다보았다.
“26년 전에 태어나자마자 악마라고 낙인찍힌 쌍둥이와 두 마리의 용... 어쩐지 예사롭게만 볼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신을 죽이기 위해 인류를 모조리 죽이겠다는 검은빛님의 말씀과 묘하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만약에 악마왕이 살아남은 진짜 내 형이고, 그래서 나와 형이 어떤 이유 때문에 인류가 자멸할 정도로 싸운다면 그야말로 딱 들어맞는 말이겠군. 인류는 자멸한 셈이니까 네 번째 인류가 살아남더라도 신에게 복수심을 갖거나 책임을 물을 생각으로 도전하기가 영 꺼림칙한 일이 되겠지. 하지만 악마왕이 실제로 내 형이라고 해도 나와 똑같은 생각일 텐데...”
검은빛은 약간 비웃는 듯이 말하다가 갑자기 말꼬리를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공중요새의 함장이 악마왕더러 자신들과 같이 싸울만한 고려대상이 아니라고 했던 말이 스쳐지나갔다. 또한 불과 며칠 전에 나무 그늘 아래에서 만났던 악마왕은 신과는 싸우지 않으며 오직 인류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 싸울 뿐이라고 했었다. 만약 악마왕이 형이라면, 그의 생각은 검은빛과는 정반대로 바뀐 셈이다.
“설마 그럴 리가?”
엎드려있던 검은빛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검은빛님, 만약 검은빛님이 인류를 모조리 죽이려들고, 악마왕이 인류를 살아남게 하려든다면 두 마리의 용에 대한 소문이...”
무심코 자신의 말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했던 깊은눈은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그의 성질은 애초에 안 건드리는 것이 낫다는 게 경험이 알려주는 보신책이었다. 검은빛은 갑자기 흙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에 올랐다.
“근처는 위험합니다!”
깊은눈도 말에 올라 마구 달리는 그를 뒤쫓았다. 그들은 다시 낮은 언덕을 지나 숲에 이르렀다. 숲의 그늘 때문에 눈이 한참이나 녹지 않았던 모양인지 땅이 질퍽거리는 곳이었다. 말이 가볍게 지쳐서 헐떡일 무렵, 절벽 근처에서 조그마한 늪지를 발견했다. 그곳에 이르자 두 사람의 신경이 저절로 곧추섰다. 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산한 바람이 일더니 어디선가 마른 풀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더 높아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 때문에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인가가 풀을 헤치고 이 늪지를 마구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깊은눈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졌던 것이다. 그들은 조금 더 말을 몰아 늪지에서 가까운 절벽 위로 올라갔다. 그곳은 바람이 더 차갑고 심한 곳이었는데 잠시 후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절벽 아래에서 내려다본 늪지에는 온통 검은 물체가 우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여기 있는 놈만 해도 천 마리는 넘겠네.”
깊은눈은 입을 딱 벌렸다. 그들은 예기치 않게 털북숭이의 집결지를 발견한 것이다. 털북숭이들은 낮게 꿀꿀거리는 소리를 늪지에 울리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신들의 영역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고약한 냄새를 말라버린 풀에 묻히고 있었던 것이다. 이 냄새는 더욱더 많은 털북숭이를 끌어들일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깊은눈은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가 먹을 것을 가져다줄 리가 없으니 털북숭이들은 상당히 굶주려 있겠지. 이놈들이 왕궁을 공격한다면 시체의 뼈라도 남게 될까?
더욱더 무서운 것은 거대한 돌연변이였다. 수십 미터에 이르는 털북숭이가 있다는 소문은 예전부터 들었었지만 실제로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가장 큰 놈은 거의 25미터에 이르는 것 같았다. 털북숭이가 아니라 거의 걸어 다니는 건물이었다. 그놈들이 으르렁거리는 목젖의 떨림은 절벽 위까지 생생하게 전해져 와서 검은빛과 깊은눈의 귓가에 울렸다. 저절로 발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깊은눈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저놈들이 나와 악마왕이 싸울 수 있도록 적당한 무대를 만드는 녀석들이란 말이지?”
검은빛은 딱딱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절대 용서하지 못하지.”
그는 말머리를 홱 돌려서 야영지로 향했다. 깊은눈도 뒤쳐질 새라 떨리는 손으로 허겁지겁 말을 몰았다.
깊은눈은 굴러 떨어지는 것처럼 말에서 내리더니 휴식왕과 가람을 찾아 자신이 본 것을 보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약간의 허풍까지 보태서 수천마리의 털북숭이 사이를 헤치고 온 것처럼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그가 이렇게 흥분할 정도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대충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사단장의 막내딸, 아침노을은 오후 늦게 야영지로 왔다. 그녀는 으리으리한 마차를 타고 수십 명의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섰다. 마차의 문을 열고 가장 먼저 내린 것은 아까의 그 사촌이라는 아가씨였다. 그녀는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 멀리서 멀뚱히 그쪽을 보고 있는 검은빛을 힐끔거리더니 아침노을이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침노을은 고작 15살이 겨우 넘어 보이는 정도의 호리호리한 아가씨였다. 평생 치장이나 하는 귀족의 여자가 안 예쁠 리가 만무했지만 그녀는 눈가의 약간 신경질적인 면이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막 울고 싶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떠밀리다시피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되었으니 기분이 썩 좋을 리가 없겠지만, 마치 죽으러 나온 것 같은 비장함까지 숨겨져 있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그녀는 무기를 손질하거나 잡담을 하며 쉬고 있는 기사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는 노예들, 군데군데 지펴진 모닥불, 바람에 흔들거리는 천막, 질퍽거리며 구두를 더럽히는 진흙을 차례로 주시했다. 결국에는 사촌의 손가락을 따라서 눈에 힘을 주고 그녀를 살피는 검은빛을 보게 되었다. 그때 그녀의 표정은 절망, 그 자체였다. 그녀는 몸을 돌려 잠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덕분에 하늘거리던 그녀의 옷이 약간 구겨졌다.
“예의상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사촌은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나 실망한 표정의 검은빛은 바위 위에 드러눕다시피 앉더니 거드름을 피웠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나지 못해 예의를 모른다.”
“못된 악마 같으니.”
아침노을은 낮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코웃음 친 검은빛은 손짓으로 근처에서 놀고 있던 미래를 불렀다. 절룩거리며 달려온 미래는 두 여자를 기웃거리더니 냉큼 그에게로 달려가 안겼다. 그녀는 검은빛과 영영 헤어지는 줄 알았다가 얼마 전에 다시 만나 기분이 아주 좋은 상태였다. 이미 엄청난 양의 나뭇가지를 주워둔 상태였기 때문에 마음도 든든했다. 사실은 그녀를 귀엽게 생각한 몇몇 기사들이 도와주었었다.
“내가 여자의 가치를 평가하자면 너희들 둘은 이 소녀보다 한참 아래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치장하고 수다 떠는 것뿐이기 때문이지. 남은 것은 쓸데없는 자존심뿐...”
그는 고개를 내젓더니 손으로 쫓아버리는 시늉을 했다.
“예의를 안다면 아버지께 인사를 하고 가는 것은 당연하겠지? 내 볼일은 끝났다.”
“언젠가는 후회할 거예요!”
아침노을은 차갑게 내뱉었지만 눈에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녀의 인생은 어릴 적부터 악마라는 소문이 퍼진 미친 남자 때문에 끝장났다고 생각했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땅이 빙글빙글 돌았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잠깐 손으로 이마를 눌렀다가 겨우 걸음을 뗐다. 그 사이 검은빛은 졸랑졸랑 따라붙는 미래와 천막들 사이를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넷을 만났다. 그녀는 숨어서 두 여자를 살피던 중이었으므로 그가 갑자기 나타나자 몹시 놀란 것 같았다. 그는 천막들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던 것이다.
“넷, 계획을 약간 수정해야겠다. 생각해 보니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녀는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녀는 단지 그 언니와 이름이 같을 뿐이잖아요! 그 귀족여자와 정략결혼을... 하시겠다고요?”
그녀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자신이 주제넘게 나섰다는 것을 말하는 도중에 알아차렸던 것이다. 이제 여차하면 주먹이나 발이 날아올 것으로 생각하고 잠시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다리에 매달려서 혀를 내밀었다가 다시 집어넣다가 하는 미래를 끌어올려 두 팔로 하늘로 높이 들며 말했다.
“아니, 내 수호천사와!”
아침노을은 대단히 겁을 먹은 상태로 사촌과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휴식왕에게 인사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뜬 눈으로 밤을 새워야했고, 해가 뜨기 한 시간 전에 왕궁을 다시 나서야 했다. 그녀는 신부답게 옷을 차려입었지만 표정은 악마에게 바쳐지는 제물이나 다름없었다. 사촌에게 거의 질질 끌리다시피 왕궁을 나선 후, 밤새 수도 한가운데쯤에 위치한 광장으로 옮겨와 버린 휴식왕 측 야영지의 어느 천막에서 훌쩍거리며 잠시 기다렸다. 이제 해가 뜨면 그녀는 정략결혼의 희생자로 무수한 소문의 근원지였던 악마에게 제물로 바쳐질 참이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에게 그러한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았다.
그 즈음 검은빛은 너덜너덜해져버린 옷을 벗고 오랜만에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새 옷 안으로 가죽갑옷을 단단히 껴입어 마치 그 옷만 입은 것처럼 위장했다. 그는 기분이 좋은지 약간 흥얼거리기까지 해서 옆에 있던 깊은눈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오늘 우리는 적의 호의를 비겁하게 역이용한 작전으로 두고두고 욕을 먹을 겁니다.”
기분이 좋은 그와는 달리 깊은눈은 침울한 분위기로 한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기사로서의 양심이 잘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에서 비겁한 게 어디 있어?”
“전쟁에서의 비겁함은 없어도 사람으로서의 도리는 어디나 있는 겁니다.”
“멍청이.”
검은빛은 간단히 무시해버리고 천막을 나섰다. 휴식왕과 가람, 그리고 무장하지 않은 약간의 기사들은 이미 광장으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왕궁 쪽의 길에서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남자와 여자들이 말이나 마차를 타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휴식왕은 약간 흥분되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들 중에 그와 싸움터를 전전했던, 그러나 그와 사이가 틀어져 아내와의 결혼을 반대했고 또한, 미쳤다는 누명을 씌워 쫓아냈던 빌어먹을 기사단장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가장 앞에서 말을 타고 오는 중년의 남자가 기사단장, ‘검의혼’이었다.
날카로운 눈매의 끝자락에는 잔주름이 생겨서 세월도 그를 비켜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위풍당당함은 젊은 시절과 비교해 보아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기사단장은 전혀 무장하지 않고 있었으나 위압감만은 대단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커다란 키는 상대가 누구든 단번에 위축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는 광장의 입구에서 말을 내려왔다. 그러고는 휴식왕을 알아보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손을 흔들었다.
휴식왕은 분노로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그는 반평생을 왕궁 바깥에서 철지부심, 복수의 칼날을 갈아야 했었다. 털북숭이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고, 대륙을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무역을 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쌓아올린 결과가 오늘 여기에 있는 자신인 것이다. 만약 이대로 털북숭이와의 싸움을 위해 기사단장과 동맹을 하게 된다면 그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미안하지만, 너와의 동맹은 없다.”
아무도 들을 수 없도록 휴식왕은 낮게 중얼거렸다.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의자도 없었지만 편안하게 앉아있을 생각으로 온 사람도 없었다. 기사단장 측에서는 그의 가족과 왕궁에서 온 근위대장 같은 대신들이 다수인 것 같았다. 그들 중 일부는 상황이 어떤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분위기 파악도 못하는 바보이거나 뭐든지 잘 될 거라고 생각하는 낙천적인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광장의 가장자리 쪽으로 쭉 늘어서서 쑥덕거리거나 시시덕거렸다. 무표정한 사람은 기사단장을 비롯하여 몇 되지 않았다. 역시 귀족의 무리는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이므로 언제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머릿속 꽉 차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 자신감이 환상이라는 것을 보여줄 차례였다.
넷이 휴식왕에게 광장에서 결혼식을 열도록 권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광장은 평평하고 넓었으나 사방이 높은 건물로 꽉 막혀있어서 조금 먼 곳에서 슬그머니 외성 문 쪽으로 움직이는 기사들을 아무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이야기소리뿐만 아니라 바람소리까지 광장을 윙윙 울리고 있었기 때문에 기척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게 숨길 수 있었다. 휴식왕은 충분히 시간을 끌다가 턱 끝으로 검은빛에게 신호를 보냈다. 검은빛은 고개를 끄덕이고 천막에 들어간 다음, 신부를 데리고 나왔다.
신부는 아름답고 화사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옷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천천히 걸었다. 그러나 절룩거리는 걸음걸이만은 어쩔 수 없었다. 멀리서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기사단장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그러나 일순 그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더니 힘껏 소리쳤다.
“아침노을! 내 딸아이는 어디 있지? 무슨 수작이냐! 동맹을 하지 않을 셈이냐!”
신부는 아침노을이 아니라 6살짜리 아가씨, 미래였던 것이다.
만약 기사단장이 비정한 아버지였다면 아침노을은 잊었을 것이며, 또한 냉정한 기사였다면 당장 뒤로 물러나 성안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안위가 걱정이 된 그는 비정한 아버지도, 냉정한 기사도 될 수 없었다. 그는 오히려 몇 걸음 앞으로 걸어와 신부가 누구인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 소녀는 누구지? 아침노을은 어디 있느냐?”
그는 호통 치며 검은빛에게 물었다. 그러나 검은빛은 이죽거리며 두 손을 펼쳤다.
“누구긴, 누구야? 내 신부지. 나의 결혼식에 와 줘서 정말 고맙군. 이제 피의 피로연이 열릴 것이니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보도록.”
그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던 미래를 끌어안아 뒤로 몸을 돌려 버렸다. 결혼식은 끝났고 시간도 충분히 끌었다. 그가 휴식왕의 기사들 사이로 사라지자 휴식왕과 깊은눈을 포함한 기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온 다른 기사들로부터 칼을 받아 불쑥 앞으로 나섰다.
“약속 위반이다! 비겁한 놈이다!”
“저쪽은 무기를 가지고 왔어!”
귀족들은 우왕좌왕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략결혼으로 동맹이 맺어지고, 화의가 성립될 것이라는 그들의 예상은 정반대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분위기는 갑자기 급반전되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봄이 온 것 같았지만 늦추위가 해 뜨는 시각, 바람을 타고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귀족들은 너도나도 달려가 말과 마차에 올랐다. 그들은 기를 쓰고 도망치려고 했다. 그들이 외성 문 쪽으로 달려갔을 때, 그곳에서는 결혼식을 전후하여 조용히 옆으로 돌아온 일단의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지휘하고 있던 가람은 허둥지둥 도망쳐 오는 귀족들을 가로막고 나서며 씩 웃었다.
“귀하신 분들이니 정중하게 모셔라.”
그의 말에 달려든 기사들이 귀족들을 말과 마차에서 거칠게 끌어내렸다. 그들은 무례하다고 악을 썼지만 막무가내인 기사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기사들은 귀족들의 겉옷을 벗겨버렸다.
“무슨 짓이야?”
“내가 당신을 대신해서 귀족 나리가 되어 드리지.”
기사들은 킥킥거리며 벗겨낸 겉옷을 입었다. 완전무장한 기사 50명은 이제 순식간에 귀족으로 변신했다. 가람도 적당한 크기의 옷을 받아 입으며 내뱉었다.
“이제 옷에 피가 묻을 이유가 없다. 모조리 죽여!”
그의 명령은 대단히 메말라 있어서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무장하지 않고 결혼식에 참가하러 온 귀족들에겐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사들은 지체 없이 칼을 휘둘러 귀족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피가 튀고, 머리가 나뒹굴고, 잘려져 나간 팔과 다리가 흩날렸다. 외성 문 앞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그때 도망친 단 하나의 귀족이 외성 문 쪽으로 달려가면서 소리쳤다.
“성문을 닫아! 화의는 깨졌다! 배신당했다!”
그 귀족은 가람에게 등을 찔렸다. 그는 쓰러지면서 성문의 문지기들이 해자 위로 길게 늘어뜨린 다리 겸 성문을 끌어올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풀썩 쓰러지며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순간적인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피를 줄줄 흘리며 길거리에 반듯이 누운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엄청난 폭음과 함께 굉장한 속도로 날아가는 두 개의 검은 쇠구슬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첫 번째 포탄은 성문 위에서 다리를 끌어올리는 문지기들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지만 두 번째 포탄은 정확히 그곳을 날려버렸다. 열심히 줄을 당기던 문지기들의 몸은 산산이 조각이 나서 흩어졌고 성문의 일부도 부서져서 우르르 무너졌다. 그러자 끌어올려지던 다리가 다시 해자 위로 텅 내려앉았다. 가람과 일단의 기사들은 귀족들이 타고 왔던 말과 마차에 올라 결혼식에 참가했던 귀족들인 양 외성 문을 들어섰다. 기사들과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지만 그들은 도망치는 귀족들을 보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성문이 왜, 어떻게 부서졌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람과 기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성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내성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성문을 열어라! 휴식왕에게 배신당했다!”
외성 문에서 연기와 먼지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있던 문지기들은 지체 없이 내성의 문을 열었다. 그들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가람과 기사들이 귀족들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칼을 휘둘렀을 때였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속절없이 가람과 일단의 기사들에게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가람은 간단히 내성 문을 점령했다.
광장의 약 50미터 뒤에서 완전히 무장한 채로 대가하고 있던 제1천인대부터 제8천인대까지, 모두 8천명의 기사들이 일제히 말을 타고 외성 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왁자지껄 떠들고 먼지를 일으키며 광장에 혼자 남아있는 기사단장을 스쳐지나갔다. 외성의 다리는 여전히 해자 위에 늘어져 있었다. 새까만 개미떼처럼 몰려든 기사들은 앞을 다투어 다리를 건넌 후, 멍한 상태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성안의 기사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싸움은 단 30분 만에 끝나버렸고, 나머지는 울부짖거나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도망쳤다. 8천명의 기사들은 더 이상 쫓지 않고 내성으로 달려갔다. 내성의 문 역시 가람과 일단의 기사들이 이미 점령해 둔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왕궁으로 진입했다. 일일이 건물을 수색하면서 공성전을 펼치면 일주일 이상 걸릴 것이라던 왕궁을 단 1시간 만에 점령해버린 것이다.
뒤이어 외성으로 들이닥친 나머지 7천명의 기사들은 도망친 왕궁의 기사들을 색출해내기 시작했고, 성문도 보수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막아섰던 이 성문은 이제 털북숭이를 막게 될 것이다. 대포는 말로 끌어 성문 근처 높은 곳에 배치했다. 왕궁은 완전히 휴식왕의 것이 되었다.
한편, 기사단장은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그는 잠시 자신의 옆을 스쳐지나가는 수천 명의 기사들을 멍청히 돌아보았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휴식왕이 깊은눈과 함께 다가서고 있었다.
“나는 휴식왕께 비겁하니 뭐니 하는 말을 하지 않겠소. 원래 전쟁이 그러한 것인데도 잠깐 착각했던 나의 잘못이니까. 하지만 단 한 가지만 묻지 않을 수 없소. 내 딸아이, 아침노을은 어디 있소?”
“오랜만에 만났는데 딱딱하게 인사도 없나?”
휴식왕은 실망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이제 복수할 순간인 만큼, 충분히 즐길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의 옆에는 칼을 빼든 깊은눈이 섰고, 뒤에도 기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반면에 허허벌판이다시피 한 광장의 한쪽에는 기사단장이 홀로 서 있을 뿐이었다.
“동맹과 화의 약속이 지켜졌다면 인사했을지도 모르겠소. 정략결혼의 약속이라도 지켜졌다면 난 당신에게 화를 내지 않았겠지. 하지만 당신은 모든 것을 깨버렸소. 그것이 어느 정도 나의 탓이라고 해도, 당신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소.”
그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더욱더 당당해졌다.
“나도 만약 자네가 거의 30년 전, 나의 결혼을 방해하지 않았다면 기분 나쁘지는 않았겠지. 또한 미쳤다는 누명을 씌워 쫓아내고,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죽이고 싶은 기분도 안 들었을 거야. 자네는 내 아들들까지 장서실에 가두고 결국엔 죽이려고 들었어. 안됐지만 자네가 나에게 책임을 묻기 전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야 할 것이야.”
휴식왕도 굽히지 않고 부딪혔다. 둘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젊은 시절에는 서로 의지하며 전쟁터를 전전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분노가 둘 사이를 휘감겼다.
“한때는 나의 친구였다는 사실을 염두하고 고통스럽게 죽이지는 않겠네. 그리고 자네 딸은 내 아들이 노예로 쓸 거라더군.”
마지막 일격이었다. 미소가 떠오르는 휴식왕과 일그러지는 기사단장의 얼굴이 극과 극으로 대비되었다. 기사단장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는 포효했다.
“으아아아!”
흡사 한 마리의 야수처럼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광장의 여기저기를 공명하며 기사들의 귀를 들락거렸다. 하지만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은 휴식왕은 태연히 물러나며 손짓을 할 뿐이었다. 기사 하나가 말을 타고 맹렬히 달려와 기사단장에게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순식간에 눈을 번뜩인 기사단장은 그 힘을 역이용하여 칼을 빼앗고 기사를 끌어내렸다. 기사는 우당탕 한쪽에 널브러졌다.
“그렇게 쉽게는 안 될 거요!”
기사단장은 헉헉거리며 눈을 치켜떴다. 그는 엄청난 수의 기사들과 최후까지 싸울 결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웃는 휴식왕은 다시 손짓을 했을 뿐이었다. 또 다시 기사 하나가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창으로 가슴을 찔러갔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렵하게 피하더니 빼앗은 칼로 말의 뒷다리를 베어버렸다. 말은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쓰러졌고 기사도 굴러 떨어졌다. 그러자 휴식왕은 다시 손짓을 했다. 이번에는 기사 두 명이 큰 칼을 들고 나섰다.
기사단장은 이미 어느 정도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상당히 불리했다. 그러나 그의 초인적인 힘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광장에서 도망가 숨을 곳이란 없다. 오직 맞부딪히는 수밖에 없었다. 기사단장은 한 기사가 칼을 크게 휘두르기를 기다렸다가 옆으로 비켜서며 손을 노렸다. 처음에는 같이 달려든 기사에게 견제를 당하여 실패했으나 곧 큰 칼을 휘두르고 중심이 흐트러진 기사의 손목을 내리쳐 잘라버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 기사는 손에서 피를 뿌리며 물러났다. 다른 기사 역시, 맞부딪친 기사단장의 힘에 떠밀려 넘어졌으나 곧 칼을 맞고 말았다.
“대단하군.”
휴식왕은 허허 웃었다. 그는 총을 꺼냈다. 기사단장은 그것이 무엇인지 열심히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폭음이 들리더니 그의 왼쪽 어깨가 찢어졌다.
“...”
비명을 지르는 것조차 잃어버린 기사단장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다시 칼을 들었다. 그는 휴식왕을 찌를 생각으로 달려들었으나 깊은눈과 총을 바꾼 휴식왕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다시 굉장한 폭음이 그의 귓가를 울리는 찰나, 온 몸에서 힘이 쑥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구멍이 뚫려서 피가 콸콸 쏟아진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절망이란 게 바로 그런 것이지. 몹시 허전할 거다.”
휴식왕의 마지막 설교를 들은 기사단장은 앞으로 철퍼덕 쓰러졌다.
가람의 진두지휘 하에 휴식왕의 군대는 왕궁 내의 모든 적을 쓸어버렸다. 워낙 넓고 숨을 곳이 많아서 시간이 다소 걸리긴 했지만 개미새끼 한 마리 놓치지 않았다. 말 못하는 짐승과 말하는 짐승, 즉 노예를 제외하고 사람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은 모조리 죽거나 꽁꽁 묶인 채로 왕궁의 뜰로 내몰렸다. 휴식왕의 아우인 총명왕만은 어디론가 도망친 것 같았는데 가람으로서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아무리 적이라고 해도 휴식왕과는 형제사이이므로 어떻게 대우해야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점심이 되기 전에 휴식왕과 검은빛, 그리고 깊은눈을 비롯한 모든 휴식왕의 기사들이 왕궁으로 들어왔다. 모래 아침까지 왕궁으로 들여보내겠다는 넷의 말대로 된 셈이었다. 가람은 그녀의 너무나 정확한 예측에 혀를 내둘렀는데 머릿속으로는 20년 전쯤에 있었던 대륙 중부의 어느 왕국에서 벌어졌던 공성전을 끄집어냈다. 그때는 왕위 쟁탈전이 아니었을 뿐, 이와 똑같은 상황이 전개됐었다. 한쪽에서 휴전을 요청했으나 그것을 역이용한 다른 왕국의 전광석화와 같은 점령계획.
그는 성문 근처에 서 있다가 노예들 사이에 섞여 들어오는 넷을 홱 낚아챘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벌벌 떨었다. 잘못한 것이 없어도 항상 비굴한 전형적인 노예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가람은 겉모습에 속지 말자는 다짐을 해둔 상태였다.
“20년 전 쯤에...”
그는 눈알을 부라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흠칫 놀랐는데 그가 노려보아서인지 20년 전이라는 말 때문인지 확실치 않았다.
“이와 똑같은 상황이 있었지. 상대를 광장으로 이끌어낸 휴전협정, 일부 병력을 몰래 우회시켜 상대의 성문을 치는 작전... 물론 그때는 대포가 없었기 때문에 몇몇 기사들이 성벽을 기어 올라가 문지기를 처리했었지. 하지만 그 이외에는 너무나 똑같아. 어림짐작으로도 네 나이는 서른이 훨씬 넘어 보이는데 그때의 일과 관련이 있는가?”
넷은 잠시 망설이는 듯 말이 없었다.
“너는 이제 짐승이 아니다. 이젠 검은빛님이 너를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물어보는 말이니 대답해 봐.”
가람은 차근차근 다독거렸다. 젊은 시절에 대륙을 돌아다녔던 그는 결혼 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잠시 전쟁터를 찾아다니며 소일거리로 삼은 적이 있었다. 20년 전의 일은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전쟁이었다. 이제 와서 기억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때의 일과 관련이 있지? 너는 도대체 누구지?”
그는 천천히 다그쳤다. 잠시 더 망설인 넷은 눈을 치켜뜨며 대꾸했다.
“맞아요. 제 나이 14살 때, 패배당한 그 왕국의 장군이 바로 제 아버지셨어요. 그러니 제가 그 일을 잊을 리가 있겠어요? 그저께 저의 생각을 물어보는 주인님의 말씀이 얼마나 반갑던지... 저는 똑같이 갚아줄 수가 있게 되었어요.”
“그 말은...”
가람은 말끝을 흐렸다.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예사 노예가 아니었다. 그녀가 변명삼아 했던 말도 부수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요, 전 귀족이었어요. 14살까지는! 맛난 음식도 먹고, 말도 타고, 춤도 추고, 치장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지요. 하지만 그날 이후 패배한 아버지를 따라 이 왕국에 숨어들었어요. 돈은 있었지만 쫓기는 처지에 귀족입네 할 수 없었기에 평범한 백성인 양 가장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억울하게 노예가 되어야 했을 때에도 우리는 뭐라고 항거할 수조차 없었죠.”
말을 할수록 그녀의 눈은 점점 독기를 품게 되어 가람이 오히려 당황할 지경이었다.
“우리 가족은 귀족이었다가 백성으로 위장했고, 다시 노예로까지 떨어졌어요. 멸망한 왕국에서 도망쳐 살아남았으니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닐지도 모르죠. 하지만. 끝이 좋지 않았어요. 부모님과 동생 모두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찢겨죽었죠. 저는 그 복수를 하고자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그 증거로 눈알을 뺐어요. 그리고 보시다시피 여기까지 왔지요.”
갑자기 그녀가 안면을 싹 바꿔 후후 웃었기 때문에 그는 소름이 끼치고 말았다. 그는 그의 아내와 며느리를 보면서 단순히 여자는 골칫덩어리이거나 귀찮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넷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여자들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는 여자가 복수를 위해 이 정도로 독하게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에요. 주인님은 내 손에 원하는 만큼 피를 묻히게 해주신다고 했어요. 저는 잔뜩 기대하고 있답니다.”
그녀는 마치 선물을 기다리는 소녀처럼 밝게 이야기하고는 어안이 벙벙해진 가람을 두고 노예들 사이로 사라졌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가람은 얼마나 피의 피로연이 계속될지 추측할 수 없었다. 어쩌면 왕궁에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수도... 그는 그것이 잘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꽁꽁 묶인 채 왕궁의 뜰에 꿇어앉혀진 왕궁의 사람들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왕국에서 권력을 휘두르던 콧대 높은 사람들이었고, 얼마 전까지는 휴식왕과의 동맹에 위기 탈출이라는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털북숭이라는 더 큰 위협을 앞에 두고 살아남기 위해 인류가, 그것도 같은 왕국 사람들이 동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아무리 왕위를 두고 다투는 사이일지라도 털북숭이라는 더 큰 위험이 눈앞에 닥쳤는데 휴식왕은 왜 이토록 아슬아슬한 선택을 했단 말인가? 그들로서는 동맹이라는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걸어가는 휴식왕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휴식왕의 기사들이 자신들을 다루는 모양새를 보고 포로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반항하는 자들은 모조리 죽여 버렸고, 항복한 자는 꽁꽁 묶어서 왕궁의 뜰에 몰아넣었던 것이다. 항복했는데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여차하면 노예나 돈, 땅을 내놓으면 될 거야. 포로들은 약간의 희망을 갖고 주위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한 여자의 출현으로 인하여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검은빛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칼을 하나 꺼내 넷에게 내밀었다.
“약속대로 넌 이제 짐승이 아니다. 음식을 주워서 먹을 필요도 없고, 맨땅 위에서 잘 필요도 없다. 그리고 원하는 만큼 네 손으로 죽여도 좋다. 이만하면 나에게 영혼을 판 보상을 했다고 본다. 동의하면 이 칼을 잡아라.”
넷은 잠시 감격스러운 얼굴로 검은빛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포로들을 보았다. 이들이 부모님과 동생을 찢어죽이고 언니를 살해한 놈들이라고 생각하자 도무지 용서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미소를 지었다.
“주인님이야말로 잘해 주셨어요. 정말로 저의 복수를 해주셨군요.”
그녀는 감사히 칼을 받았다.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는 이 애꾸눈 여자는 아무리 보아도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포로들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주시했지만 그녀는 가차 없었다. 넷은 칼을 거꾸로 쥐고 첫 번째 포로의 목을 그었다. 그 포로는 순식간에 비명소리를 질러댔고, 나머지 포로들도 아우성쳤다. 이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아아아... 이제야 복수를 해요. 부모님과 동생과 언니의 복수를... 대가로 한쪽 눈을 잃었지만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동안 겪어야 했던 고통과 한을 몇 배로 갚아줄 거예요. 저는 이제 행복해요... 그녀는 정말 행복한 표정으로 포로를 하나하나 찔러댔다. 피가 솟아올라 온 몸에 번지고 악다문 입으로 가쁜 숨이 새어나왔다. 포로들도 살려 달라, 용서해 달라, 돈을 주겠다! 등등 아우성치거나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녀만이 이 무대의 주인공이었다. 마치 새빨간 악마가 된 그녀는 헉헉거리면서도 하나라도 더 죽이기 위해 온힘을 끌어내고 있었다. 등을 내리 찍고, 목을 긋고, 팔을 잘라냈다.
“검은빛님! 아니, 왕자전하!”
그 와중에 누군가가 다급하게 불렀다. 막 자리를 뜨려던 검은빛은 왠지 익숙한 그 목소리에 뒤돌아보았다. 포로 중 하나가 필사적으로 몸을 굴러 그의 곁으로 오려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저를! 저를 아시겠지요?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제 목숨을 한 번 살려주시기로!”
“기억이 안 나는 걸?”
“저, 네모입니다! 네모! 장서실에 계실 때 제가 구해드렸더니 제 목숨을 한 번 살려주시기로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그가 바로 네모였다. 그는 그답지 않게 필사적으로 변해 있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때에 웃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묶였기 때문에 일어설 수 없었고, 얼굴이 바닥에 닿아 가죽이 훌렁 까지고 있었지만 살아남는 것이 먼저였다.
“제발! 그 약속을 생각해 내십시오!”
그는 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제정신이 아닌 넷이 이미 근처까지 왔던 것이다.
“운이 좋은 놈이군. 가까스로 기억이 났어. 저놈은 끌어내! 형이 했던 약속이라도 결국은 약속이지. 난 약속을 잘 지키니까. 나머지는 하나도 살려두지 마. 저 여자가 흥미를 잃으면 너희들이 모조리 죽여라. 지루하면 벼랑에서 밀어도 상관없다.”
검은빛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기사들에게 명령하고 발길을 돌렸다. 네모는 갑자기 긴장이 풀어지는지 축 늘어진 채로 끌려나왔다. 그는 그날 왕궁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 by | 2007/03/16 19:26 | 검은 날개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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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생각했던 그 가설[?]이
어쩌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ㅋㅋ
이것도 이것대로 좋음